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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베풀어라

앞 장 **’불안을 조성하라’**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게 함으로써 종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으로 교주의 역할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불안한 상태로 머물러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안을 조성했다면, 이제 그 불안을 해소하는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으면 해탈할 수 있다”**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당신도 불안을 조성했다면, 반드시 구원의 길도 제시해야 합니다.

구원의 방법: 내관(內観) 치료법에서 배우다

구원을 베푸는 방식의 예로, **’내관(內観) 치료법’**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방법은 일본의 정토진종(浄土真宗) 계열 신흥 종교에서 발전한 심리치료법으로,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어주고 이를 해소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내관 치료법에서는 상담자가 피상담자에게 **”어머니에게 받은 것, 돌려준 것, 그리고 폐를 끼친 것을 되돌아보세요”**라고 요구합니다. 때로는 대상이 아버지, 형제, 상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진지하게 되짚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부모에게 해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 피상담자는 강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계속되면, **’나는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구나’**라는 감정이 **’그래도 이렇게 부족한 나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사랑해 주었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면 내관 치료는 성공한 것입니다. 즉, ‘불안’이 ‘구원’으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내관 치료법은 알코올 중독, 신경증, 가정폭력, 범죄자 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효과가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한 상태에서도 **’나는 도움을 받고 살아왔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마무리되지만, 이 방법의 원형인 정토진종의 수행법에서는 **’이런 형편없는 나도 아미타불이 구원해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핵심은 동일합니다. 불안을 조성한 후, 해소의 길을 제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신도들에게 불안과 구원의 연쇄작용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구원과 저주의 이중성

또한, 신도들이 구원을 통해 안심한 후에도 **’이 종교를 떠나면 다시 불안해진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교단을 떠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같은 노골적인 협박은 좋지 않습니다. 외부 시선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대신,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당신이 지금 행복한 이유는 우리 종교 덕분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먼저 **”이 상태로 살면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라고 불안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그 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이 해결책을 받아들인 신도는 **’이제 천국에 갈 수 있구나’**라며 안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다시 지옥의 공포가 엄습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신도는 신앙을 잃으면 정신적인 평안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더욱 신앙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예수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불안한 상태로 돌아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매년 신사에서 부적이나 파마야(破魔矢, 액막이 화살)를 사는 것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이 부적을 샀기 때문에 올해 운이 좋았던 것 아닐까?’**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형성되면 신도들은 종교를 쉽게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도 신도들에게 ‘한 번의 구원’이 아니라, 계속적인 종교적 헌신을 요구하는 구원을 제공해야 합니다.

교단을 단단하게 만드는 구원의 기술

이제 신도들이 ‘구원’을 통해 종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예정설(予定説)’**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정설이란?

예정설은 신앙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개념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신을 믿게 되는 것은 그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을 하나의 신비로운 은총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신이 선택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신을 믿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신이 선택한 자만이 믿을 수 있다.”

즉, 신앙을 갖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니라, 신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순히 믿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이 그들에게 믿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를 신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신자 A가 갑자기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죠. **”정말 신이 존재하는 걸까?”**라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예정설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을 잃는다는 것은 곧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A는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나는 여전히 신을 믿고 있다!”**고 자기 암시를 걸며 신앙을 유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즉, 신앙을 잃을 가능성마저도 종교 안에서 해결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 예정설입니다.

이 원리를 활용하면, 당신의 신도들도 **’신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증거’**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과 저주는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적절한 불안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신도를 유지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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