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곤란할 때 신에게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아무 문제 없이 사는 사람들은 종교를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곤란함은 역시 **’죽음’**이지만, 젊을 때는 죽음을 현실적으로 고민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토진종(浄土真宗)에서는 **젊고 건강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도 ‘아미타불에게 의지할 기회가 찾아왔다!’**고 여깁니다. 이는 정토진종이 ‘죽음에 대한 자각’을 신앙의 중요한 계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내세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며, 이는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여겨집니다.고 칭찬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논리적으로 접근해 봅시다. 사람들은 곤란한 일이 없기 때문에 종교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곤란한 상태로 만들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집 앞에서 난동을 부려 불편을 주는 것처럼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는 더 세련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불안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불안을 활용하는 방식
예를 들어 기독교를 살펴봅시다. 기독교에 따르면,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사실 우리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란 바로 아주 먼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과일을 먹은 죄를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살아가다 죽으면 100% 지옥행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면 반드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신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평소에 아무 문제없이 살던 사람도 갑자기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그동안 전혀 몰랐지만, 나 사실 큰일 난 거 아냐?”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다면, 불안하게 만들면 됩니다.
다음으로 불교를 살펴봅시다. 불교에서는 선행을 쌓으면 죽어서 천계(天界)로 갈 수 있습니다. 천계는 대체로 천국과 비슷한 곳이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천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계의 존재들도 결국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고, 다시 지옥이나 악한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해탈을 통해 윤회를 벗어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논리가 나옵니다.
즉, 기독교와 불교 모두 ‘사람들은 사실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겉으로 보면 억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민은 가지고 있으며, 노화와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이라는 논리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곤란한 상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곤란한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실 이런 이유로 이미 문제가 있는 상태입니다”**라고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어떤 이유를 제시할 것인지가 종교의 개성과 차별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됩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문제를 당신만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석가모니)를 생각해봅시다. 석가모니는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궁궐 밖을 나가 늙은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문유관(四門遊観)’이라고 불리는 일화로, 그가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늙거나 병에 걸릴 때까지 노화와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왕자로서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노인과 병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왕자로서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늙음과 죽음은 피할 수 없잖아! 나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거잖아!”
이것이 불교가 탄생한 계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문제를 부처는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현대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사실 이미 곤란한 상태다’**라고 인식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불안감만 제대로 조성할 수 있다면, 신자는 쉽게 종교를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강한 불안감을 가진 신자는 쉽게 종교를 버릴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 ‘에코(환경 보호)’
오늘날, 이 전략을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에코(Eco)’ 개념입니다.
환경 보호 운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미래에 지구가 망해서 우리가 살 수 없게 됩니다.”
사실, 과연 미래에 환경이 얼마나 악화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경 보호 운동이 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는 문제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 에어컨 온도를 올리고,
- 쌀뜨물을 화분에 붓고,
- 친환경 가방을 사서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상태로 살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환경 운동은 **”이 상태로 살면 미래에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월적 신과 내세를 기반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반면, 환경 운동은 과학적 연구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위기를 경고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에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지만, **’이 상태로 가면 지구가 위험해진다’**는 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반응합니다.
환경 보호 운동을 종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방식에서 종교 지도자가 참고할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